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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출생과 성장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농부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도산은 16세에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으며, 민족의 불행이 힘의 부족 때문임을 깨닫고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895년 서울로 올라온 도산은 밀러학당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하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를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를 인식하며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사회운동에 참여한 그는 평양지회를 설립하고 만민공동회를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며 연설했다. 그는 근대화와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개혁과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며 정치 및 사회사상을 발전시켰다.

1899년 독립협회 해산 후 고향으로 돌아온 도산은 점진학교를 설립해 교육구국운동에 매진했다. 3년 간의 교육활동 후 더 큰 실력을 쌓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1902년 결혼 후 유학길에 올라 하와이를 경유하며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도산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국내활동 / 신민회 결성 (1907년 ~ 1909년)

1907년 귀국한 도산 안창호는 애국지사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국민계몽과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 회복과 근대적 자유문명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도산은 교육, 언론, 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과 애국교육을 실행하였다. 또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고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신교육 보급과 비밀연락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세워 민족산업을 육성하고자 했다.

신민회는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만주,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에 기지개척운동을 전개했다. 도산은 이 과정에서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와 연계하여 해외 지회를 설립하고 국제적 연대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도산에게 '청년내각' 구성을 제안했으나 도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성학교 학생들이 일장기 사용 요구를 거부하는 등 도산의 활동은 민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고,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도산과 신민회는 산업·교육·국방의 실력을 키우며 국권 회복을 위한 준비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의 활동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 민족의 단결과 실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망명과 독립운동기지 개척 (1909년 ~ 1911년)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후, 도산 안창호는 일제로부터 철저히 감시받게 되었다. 이토 처단의 배후로 의심받던 도산은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도산과 신민회 회원들은 망명을 결심, 1910년 도산은 중국 산동성 위해위를 거쳐 독일 조계지였던 청도로 이동하였다.

청도에서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는 ‘청도회담’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만주 밀산현에 농토를 개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였다. 동시에 국내 신민회 회원들은 서간도 삼원보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며, 농지 개간과 신흥강습소를 통한 민족교육 및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도산은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러시아 내 한인 사회를 조직적으로 지도하며 국민회 지회 설립과 학교 운영을 논의하고, 애국심 고취를 위한 강연을 지속했다. 그는 재러 한인 청년들과 함께 <청년근업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러시아 당국과 교섭하며 귀화 조건 완화와 집회 허가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북만주 봉밀산 기지를 방문해 농업 경영과 숭무학교를 통한 군사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산의 활동은 러시아 한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인들의 단결과 독립운동 의지를 북돋았다.

1911년, 도산은 원동사업의 진전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북만주 목릉을 방문해 농업 투자 상황을 확인한 후, 러시아, 독일, 영국을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망명 기간은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국제적 네트워크 확장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차 미국생활 /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1911년 ~ 1917년)

 

1911년, 도산 안창호는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와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를 통해 북미,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 전 세계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며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 《신한민보》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미국무성과 캘리포니아주로부터 자치단체의 권위를 인정받아 한인들의 권익 신장과 자치 기반 마련에 기여했다.

1915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를 운영하며 한인 2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하도록 돕고, 1917년에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또한, 멕시코를 방문해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던 한인들을 지원하며 학교와 실업회사를 설립할 것을 독려했다.

1913년,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흥사단은 민족 대업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양단체로, 무실역행과 충의 정신을 바탕으로 지·덕·체를 수련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하였다. 도산은 흥사단을 독립운동의 기초적이고 준비 단계의 운동으로 규정하며, 인재와 재정을 확보해 독립군과 정치, 외교, 경제 분야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체계를 구상했다.

도산은 흥사단의 조직력을 강화하며 다양한 지역에 단원을 확보했고, 독립운동의 진행과 완성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비전은 단순한 독립을 넘어 광복 후 조국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까지를 내다보는 것이었다. 흥사단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하며 1948년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활동과 국민대표회의 (1919년 ~ 1921년)

1919년 3·1운동 이후, 도산 안창호는 미국 내 한인들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이미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서 도산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서리로 임명되어 헌법 제정, 비밀연락망 구축, 《독립신문》 창간, <대한민국적십자회> 결성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상해·한성·노령의 세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노력했다.

도산은 임시정부의 빈약한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 축소와 역할 분담을 제안했다. 상해는 기록 및 연락을, 노령은 군사기관을, 미주는 독립자금 조달과 외교활동을 맡도록 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국민의 납세, 직업 보장,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심화되며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도산은 이승만 대통령 중심의 단결을 호소했지만, 위임통치안 논란과 외교총장 임명 문제 등으로 정부는 난관에 봉착했다. 이에 도산은 1921년 노동총판을 사임하고, 국민적 공론을 도출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는 61개 단체에서 124명의 대표가 참석하였으나, 임시정부 존속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결렬되었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존속하며 각 단체를 통합하자는 ‘고수론’을 주장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회의의 실패 이후에도 도산은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 결성을 추진하며 대동단결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북경을 거점으로 반임정 세력과의 협력을 시도하고, 만주와 중국 각지로 운동을 확산시키며 독립운동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3차 미국생활과 흥사단(1920년 ~ 1925년)

도산 안창호는 흥사단 운동을 통해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흥사단은 개인적 수양을 넘어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위한 심신 훈련과 사회봉사를 핵심으로 하였다.

 

도산은 유망한 청년들을 단원으로 포섭하며 흥사단의 이념을 전파했고, 1920년에는 중국·연해주·국내·일본 등지에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를 결성하여 조직을 체계화했다.

그는 좌우익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도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며, 다양한 사상과 의견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통합하려 노력했다. 위원부는 이상촌 건설과 재정 확보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현실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어학 및 전문교육을 실시하며 1924년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도산은 이상촌 건설을 위해 길림, 진강 등 중국 각지를 답사하며 적합한 지역을 물색하였고, 동남아시아와 내몽고 지역까지 이민촌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다양한 노선을 조화롭게 수용하고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였다.

1924년 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를 지도하며 독립운동의 통일과 조직화를 강조했다. 그는 동족간의 분열을 경계하고, 통합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호소하였다.

도산은 또한 일본과의 단절을 주장하며, 모범촌 설립과 실업기관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제 시설 파괴와 경제적 저항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을 강조하며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유일당 운동과 한국독립당 결성 (1926년 ~ 1932년)

1926년, 도산은 오랜 타국 생활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왔지만, 독립운동의 여건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만주 지역은 경제적 어려움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생존조차 위협받고 있었다. 특히 1925년 체결된 미쓰야 협정은 한인 독립운동을 근본적으로 막는 내용으로, 무장 해체와 총기 몰수 등 가혹한 조치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도산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 대단결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만주 지도부를 내각에 끌어들이며 통합을 시도했지만, 내부 혼란이 계속되었다. 도산은 국무령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자연인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의 유지와 대혁명당 조직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민족 대통합을 위해 역할 분담과 협력을 강조하며 각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다.

1927년, 도산은 북경을 거점으로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며 독립운동 단체들을 결집하고, 만주로 이동해 현지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비했다. 만주에서 개최된 순회 강연에서는 500여 명이 참석하는 등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사회의 큰 호응을 얻었으나, 중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석방 후 그는 경제적 자립을 강조하며 농민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한인 사회의 재건에 힘썼다.

도산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을 뛰어넘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 전체가 단결해야 함을 역설했다. 한·중 항일 공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중국 혁명세력과 협력하였고, 다양한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혔다. 특히, 경제적 자립과 정치적 통합이 독립운동의 기초임을 강조하며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도산은 한국독립당을 결성하며 독립운동 단체의 규합과 조직화를 본격화했다. 일본의 탄압 속에서도 그는 한인과 중국인 모두가 협력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하며,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을 통한 항일 투쟁 기구를 조직하고자 노력했다.

1932년 체포되기 전까지 도산은 한·중 항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으며, 그의 노력은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도산의 독립운동은 끝없는 헌신과 협력을 기반으로, 민족의 대단결과 자주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옥고와 국내에서의 구국활동 (1932년 ~ 1938년)

1932년 4월 29일, 도산 안창호는 상해에서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제와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6월 7일 인천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심문 후 4년 형을 선고받았다. 도산은 대전감옥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가출옥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이어갔고, 평남 강서군 송태산장에서 은거하며 <동우회>를 배후에서 지도했다.

1931년 신간회 해소 후 <동우회>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직적 운동을 이어가며 학계·언론계·산업계에서 활동했다. 일제는 이를 단순 수양단체로 가장한 독립운동 조직으로 간주하며 탄압을 강화했다. 1937년 동우회 회원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졌고, 도산은 송태산장에서 체포되어 종로 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도산은 위장병과 폐결핵으로 위독해져 경성 제국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1938년 3월 10일 6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도산의 사후, 일제는 동우회와 <흥업구락부> 단원들에게 전향 성명서를 강요하며 민족운동을 탄압했다. 1941년, 동우회 사건은 전원 무죄 판결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는 도산 서거 후 4년 5개월이 지난 일이었다. 도산은 마지막까지 민족운동을 이끌며 희생과 헌신의 삶을 실천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1차 미국생활과 공립협회 결성(1902년 ~ 1907년)

1902년, 도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노동을 하며 학업을 병행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분쟁을 일삼는 한인들의 삶을 보며 동포 생활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1903년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생활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1905년, 도산은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공립협회는 6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미주 한인 사회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로 자리 잡았다. 협회는 샌프란시스코에 회관을 마련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간해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6년, 일본의 을사늑약 체결에 맞서 공립협회는 하와이 에와친목회와 연대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결의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도산은 이 과정에서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체계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연합기관의 설립을 구상했다.

1907년,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를 발기하며 국내외 한인사회의 통일과 연합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를 기반으로 귀국한 도산은 윤치호, 양기탁 등과 함께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하며 독립운동의 조직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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